감상[읽고적는글]

[맑은 날] - 유희경, <오늘 아침 단어>

losenvex 2012. 12. 24. 22:36

[맑은 날]

짬뽕이란 단어는 어떻게 발음해도 슬퍼지지 않는다
단단히 묶인 팔자 매듭처럼 풀리지 않는 숙취는
이토록 웃기다 거진, 습관이란 게 그런 거지만,
물에서 짬뽕 국물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새인지 비행기인지 모를 것이 떠 있는 하늘에서
뭐가 내릴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날엔 내게 없는
아내가 식탁에 앉아 펑펑 쏟는 눈물을 보고 싶다
그 앞에서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배를 물고
아내를 지켜보는 단답형 남편이 된 것도 같고
그런 게 어떤 기분인지 알 길 없는 것도 당연하다
도저히 착해지지 않는 마음을 뒤져보아도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는 글자만 가득할 뿐 그러니
짬뽕이란 단어는 조금 슬프고 너무 웃기기도 해서
생활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오늘 아침엔
대단한 물건인 양 배달되어온 책을 받아들고
이럼 석 자 장중하게 적어주는 내가
똑같은 글자를 자꾸 적고 비실비실 웃는
혀를 쥐어짜 사과라도 해보려 하는 내가

- 유희경, <오늘 아침 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