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읽고적는글]

<뿌넝숴>, 김연수 - 2010.09.27

losenvex 2012. 2. 17. 03:41

<뿌넝숴(不能說)>, 김연수

20041193 김태형

1. 작가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강화에 대하여>외 4편으로 등단했으며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 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으로 2001년 동서문학상을 받았으며, 단편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때>로 2003년 동인문학상을, 단편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2005년 대산문학상을, 단편소설 <달로 간 코미디언>으로 2007년 황순원문학상을, 단편소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가지 즐거움>으로 2009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2. 작품

 

과거 6.25 전쟁 때, 중공군 40군단으로 참전했던 군인이, 지평리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한 조선인 여성 구호원에게 구조되지만, 부상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 여자는 죽고 홀로 포로로 잡혀 살아남는다. 후에 작가를 만나 자신의 기억을 들려주고 있다.

 

3. 분석

 

1) 문체

전쟁 기억을 회상하여 이야기하듯이. 한시(漢詩)를 중간 중간 섞어가며. 뿌넝숴. 뿌넝숴.

 

2) 삶의 고발

6.25 전쟁으로 왼쪽 다리와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잃은 노인의 이야기.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은 기록될 수 없음을 말한다.

 

3) 삶의 이해

 

한편 제23연대는 3일 동안 4배가 넘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52명의 전사자와 259명의 부상자, 42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중략) 반면 지평리에서 미 제23연대에 의해 사살된 중공군은 포로 79명을 포함 5,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때 포로가 된 중공군의 진술에 의하면 지평리에 투입된 중공군은 5개사단에서 1~2개 연대씩 차출하여 총 6개연대가 투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The battle was a major turning point in the Korean War in that it marked the end of the CPVA holding the initiative. (중략) The fighting at Chi'pyong-ni established that UN and U.S. forces could withstand anything and everything that the Communists could throw at them. The CPVA never again held the clear strategic initiative in the war.

 


저는요,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되자.’라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딴에 좋다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할 일이라고는 공부뿐이었으니 다짐하려던 목표도 딱 그만큼이었을 거예요. 아는 것, 들은 것, 생각한 것이라고는 모두 책에 있던 것이고, 하고픈 것도 그 책에 제 이름 한 줄 더 추가하는 정도였죠. 피로 얼룩진 역사, 역사의 뒤안길, 역사의 소용돌이는 그저 영웅을 돋보이게 하는 수식어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사는 역사일 뿐, 그 앞에도 뒤에도 아무것도 없었죠.

대학에 왔습니다. 제겐 역사를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죠. 예상했던 길에서 반 발자국 어긋났지만 금방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죠. 하지만 그 어긋난 반 발자국에서 다른 세상을 만납니다. 제가 읽던 책엔 없는 세상이었죠.

거기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로 돕고 상처주고 사랑하고 아파하는 삶이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것들뿐이었어요. 알아가야 할 뿐이었죠.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살아가고, 사랑하고……. 제가 거기서 찾은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서로 행복할 수 있는 삶, 홀로 살지 않는 삶,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삶이 거기 있었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왜 하냐고요? 역사엔 없었거든요. 역사엔 없었어요. 거긴 기록만 있었습니다. 그 누구의 삶도 역사에 녹아있지 않았어요. 사실이 존재하고 사람들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있는 거라곤 나라, 전쟁, 날짜, 영웅 같은 것들뿐이었죠. 그제야 역사는 표면으로만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장막 뒤의 삶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저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가 진행될 때마다 누군가의 삶은 파괴된다는 거죠. 자발적으로 역사의 진행에 저항했든, 우연히 역사가 진행되는 기로에 놓여있었든, 파괴되는 삶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삶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아요. 누가 보상해주는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또 별로 없어요. 내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더 슬퍼요.

맞아요. 기록된 것이 역사고, 남은 것이 역사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보고 우리는 그 시대를 모두 알 수 있을까요? 당시의 사건? 알 수 있겠죠. 일이 일어난 배경과 과정, 결과는 자세히 적혀있으니까요. 사건의 주범, 시기, 영향 같은 것들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남겼거든요. 그래서 다들 ‘안다’고 합니다. 아는 거죠. 배웠으니까 아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일 뿐이에요. 그 역사를 격은 사람들의 삶은 교과서의 설명 몇 줄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나긴 유신시대를 버텨온 부모들을 지금 세대는 이해하지 못해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산화한 사람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죠. 그러니 6.25전쟁과 일제강점기를 이해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다만 그런 일이 있었음을 상상할 뿐이죠.

 

그럼 역사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역사는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역사의 사전적 의미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으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록’입니다.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글론 남긴 거지요. 근데 기록을 하려다보니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아 그럴 수 없게 됩니다. 모두 다 적기엔 종이는 부족하고 보관하기도 힘들었거든요.

그럼 그중에 뭘 기록 하냐고요? 적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사실이라고 판단되는 것들만 남겼을 겁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이 모두 옳다고 할 수도 없어요. 이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거든요. 정보가 부족해 잘못된 결론을 낼 수도 있고, 필요 없다고 생각되어 누락된 사실들도 있을 겁니다. 도중에 재정리를 하며 옮겨 적는, 혹은 번역하는 사람의 실수도 추가되고요. 악의를 가지고 기록을 고치는 혹은 추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게다가 보통의 역사는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남겨지기에 의도적으로 꾸며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남기기 싫어하니까요.

아니요. 그렇다고 역사를 모두 거짓으로 가정할 필요는 없어요. 모든 역사를 한 사람이 쓰는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왜곡한 기록도 다른 사료나 유물을 통해 진실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해요. 역사에 담기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요. 역사의 흐름이라는 핑계로 더 이상 피해를 입는 삶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때로는 그들을 위해 대신 싸워줄 수도 있고, 선대의 잘못은 우리가 사과할 수도 있는 겁니다. 후대에 거짓을 남기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역사는 수많은 삶과 죽음으로 쌓인 기록이에요. 그것을 단순화했다고 각각의 삶을 똑같다고 보면 안 되는 거죠. 기본을 이해하되 모두의 삶을 듣고 공감하는 자세가 필요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