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비밀과 거짓말>
- <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덧, 알 수 없는 부모의 태도를 이해하려는 당신과 은희경의 기존과 다른 소설을 읽고 싶은 당신에게 추천함.
너 정말 아버지 모르는구나. 갑자기 영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아버지를 어떻게 알아? 내가 무슨 아버지 아들이라도 돼? 아버지한테는 형만 아들이었잖아. 영준 역시 입술을 깨물었고 자신의 인내심이 마지막에 이른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평생 네 뒤를 쫓아다니면서 뒷감당을 해준 거냐? 너는 뭐든지 아버지가 다 해결해줬잖아. 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다 했지만 언제나 모든 걸 혼자 힘으로 해내야 했어. 어디 아버지 뿐이야? 늘 말썽만 피웠어도 사람들은 모두 내가 아니라 너를 좋아했어. 나한테는 봐주는 게 없었다구. 그래, 형이 장남이고 똑똑하니까 뭐든지 다 당연히 자기가 가져야 한다 그거지? 내가 부스러기 좀 갖고 있으면 그것까지도 자기 걸 뺏긴 것 같아서 아까운 생각이 들지? 모두가 날 좋아했다고? 형은 사람들이 마음을 써줄 때는 고마워하지도 않다가 조금만 관심을 안 가지면 혼자만 소외된 사람처럼 인상 쓰고 괴로워하는 이기주의자야. 폼만 잡으면서, 진짜외롭고 힘든 게 뭔지 알기나 해? 그럼 진짜로 외롭고 힘든 사람이 너라는 거냐? 폼 잡는 건 너 아니었어?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너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면서, 무슨 사연 있는 반항아라도 되는 것처럼 실컷 폼 잡았잖아. 공부할 필요도 없고 아버지 눈치볼 일도 없고. 내가 다른 놈들에게 밀릴 까봐 책상 앞에서 피를 말리는 동안 너는 주먹질이나 하고 돌아다녔어도 아버지는 너만 챙겼어. 끝까지 억지소리를 하는군.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았던 건 형이야. 형이 해달라는 건 뭐든지 해줬어. 아버지 마음에 안 드는 건 말도 안 꺼냈으니까 그랬지. 내가 너처럼 사고 치고 병원비를 물어달라고 했냐,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했냐. 나는 말야, 내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 생각대로 움직였다구. 형만 그랬고 나는 뭐 안 그런 줄 알아? 내가 뭘 내 마음대로 했다는 거야. 주먹질? 안 해도 되는데 그런 거 하고 다니는 놈이 어딨어? 형이 뭘 알아. 평생 자기만 알고 저 잘난 맛에 주위 사람이 상처받든 말든 제멋대로 하고 살았던 냉정한 인간이 뭘 아냐고. 아버지가 누구 편이라는 말을 기어이 내 입으로 듣고 싶어서 그러는 모양인데, 말해주지. 아버지가 형한태 주라던 유산, 내가 다 가로챘어. 거기 북도 있었고. 형은 아버지가 북 치는 거 알기나 해? 아버지는 늘 형을 기다렸어. 집에서 현관 벨소리가 나면 꼴 보기 싫게도 금방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어. 병실에서도 문소리만 나면,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동자가 움직이는 게 보이더라구. 근데 형은 한 번도 안 찾아왔어. 단 한 번도. 아버지 묘 한 자리 못 남기고, 이재 아버자 집까지 팔아치우면서, 장남이라고 자기를 죽이고 아버지 위해 살았다고? 나, 형한테 북 절댜 줄 수 없어. 아버지 재산 아무것도 못 줘. 형은 그럴 자격 없어. 형은 뭣도 아니야. 이 새끼야, 집을 팔라는 건 아버지 뜻이야. 네 주제에 뭘 알아. 너는 평생 철들기는 틀린 놈이야!
ㅡ <비밀과 거짓말>, 은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