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1일 · 서울 · 고삐풀린 뇌
공부를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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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p) 나는 연구실의 학생들에게 뇌 연구의 황금기는 바로 지금이고, 따라서 사업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시기라고 말한다. 얄팍한 동기부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뇌 기능에 대한 이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이와 함께 뇌를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게 측정하고 조작할 수 있는 기술들이 출현한 덕분에, 우리는 생물학적 과정의 수준에서 인간의 행동 및 인지 현상들에 관한 새롭고 종종 직관에 반하는 진실들을 통찰해왔다.
(60p) 오래전 나는 심리 상태와 환경, 약물 효과의 상호관계를 극적으로 깨달았다. 학기 말 시험 기간에 LSD를 먹어보기로 한 두 친구는 내게 자신들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 ‘네드’란는 친구는 시험이 막 끝난 뒤라 세상의 모든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다른 친구(‘프레드’라 부르자)는 며칠 후 시험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학기 중에 가장 힘들어 한 물리학 시험이었다. 네드와 프레드는 약을 삼키고, (중략) 소파에 편히 앉아 환각체험을 준비했다. 네드는 전형적인 LSD 도취에 빠져 천장의 색들이 변하는 것을 보았고 내내 황홀감에 취해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반면에 프레드는 지옥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침울하게 앉아 있었지만, 그 뒤로 심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는 곧 엉엉 울고, 몸부림치며 뒹굴고, 물리학 방정식과 키르히호프의 회로 법칙을 큰 소리로 읊어댔다. 그러고는 자신은 그 보잘것없는 핵력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거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괴물 같은 닐스 보어가 뾰족한 어금니에 피를 뚝뚝 흘리면서 자기를 공격한다고 상상했다. 약물 증상의 전형적인 불쾌한 체험을 경험한 프레드는 이후 다시는 LSD를 사용하지 않았다.
(87p) 우리가 중독을 질병이라고 말하면, 중독자들에게 반사회적인 행동과 선택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게 아닐까? 전혀 그렇지 않다. 중독을 질병으로 보는 모델에 따르면 중독의 발병을 중독자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독에서 회복하는 것은 중독자의 책임이다. 우리는 심장병 환자에게 발병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심장병 진단을 받았다면 건강한 식사, 규칙적인 운동, 치료제 복용을 통해 병에서 회복하는 것은 환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중독이 병이라는 믿음은 중독자에게 회복과 그에 필요한 노력과 책임을 면제해주지 않는다. 회복은 무임승차가 아니기 때문이다.
(116p) ‘제인’은 여키스 국립영장류 연구 센터에서 사는 짧은꼬리원숭이다. (중략) 연구결과는 인간의 스트레스 유발성 식사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실험에서 제인처럼 사회적 지위가 낮은 원숭이들은 먹이를 더 많이 먹었을 뿐만 아니라, ‘식간에도’ 먹기 시작했고, 고지방 위로 음식(즐거움을 주는 음식) 중심으로 식단도 바뀌었다.
실제로 적당한 스트레스는 설치류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포유동물의 식욕을 자극한다. 몇몇 설치류 종에서 만성적인 억압 스트레스, 찬물에서의 강요된 수영, 지배적인 침입자 도입으로 인한 사회적 스트레스는 먹이 활동을 증가시키고 지방과 당분이 많은 고칼로리 음식을 선택하게 한다. 이는 체중 증가로 이어지고 특히 복부 체지방을 증가시킨다.
(152p) 섹스 중독자들은 모든 유형의 중독 환자들 가운데 가장 도움을 요청하려 하지 않는다. 어쨌든 대중 문화는 성을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모든 사람이 항상 최고의 섹스를 즐길 자격이 있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파한다. 섹스 중독자들은 또한 동정적으로 치료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성적 행동은 백 퍼센트 본인의 의지력에 달려 있다고 믿는 경향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비극이다. 사람은 아차 하는 순간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음식 중독자가 될 수 있고, 만일 당신이 양심적으로 약물을 사용한다면 그로 인한 고통은 주로 본인의 몫으로 남는다. 이에 비해 섹스 중독자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이용해 그들에게 크고 작은 감정의 상처를 남기기 때문에 동정심의 경계를 벗어난다.
(169p) 리가 몇 번의 도박과 재발의 주기를 거치는 동안 전문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경력을 쌓아갔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강박적 도박꾼들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과감성, 추진력, 집중력을 직장에서 발휘하면 매우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도박 중독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업계에서 성공적이고 생산적이며 혁신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 한편으로 이런 사회적 위치는 자신이 자제력 있는 사람이라는 자아상을 강화해 아주 비참한 상황에서 조차 도움을 구하는 일을 주저하게 만든다.
(175p) 이 시간은 노름하는 사람이 슬롯 머신이나 룰렛 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거나 블랙잭에서 카드가 뒤집혀지기를 기다리는 시간과 유사하다. 이 결과에 대한 하나의 타당한 해석은 우리에게 모험적인 사건에서 즐거운 흥분을 얻어내는 프로그램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도박을 좋아하는 데 초기의 보상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그보다 불확실성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여러 학자들이 제안한 진화론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위험을 감수하는 신경 체계들은 중요한 사건에 직면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동물에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믿을 만한 단서를 더 찾게 하는 방식으로 적응성을 높인다고 한다. 고대에는 이 위험 감수가 식량을 수집하는 여자들보다 사냥을 하는 남자들에게 더 유리했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 도박 중독을 비롯해 충동조절장애들이 남자들에게서 더 많이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213p) 물이주는 쾌감의 기대치를 나타내는 그 도파민 뉴런들은 그 정보가 더 이상 쓸모없어졌을 때에도 정보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원숭이들은(그리고 아마 인간들도) 정보 자체에서 쾌감 도취를 얻고 있었다.
내 생각에 이 실험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완전히 무용하고 추상적인 어떤 것, 즉 단지 알기 위해 아는 것이 쾌감-보상회로를 가동시킬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음식이나 물 또는 섹스처럼 삶에서 필수적인 것들에서 얻어낸 쾌감이 아니다. 또한 추상적이지만 어떤 유용한 것으로 교환 가능한, 실제 세계의 어떤 혜택을 대표하는 금전적 보상의 쾌감도 아니다. 심지어 자선 기부나 긍정적인 사회적 피드백을 받는 쾌감과도 다르다. 이런 피드백은 사회 집단을 이루도 사는 동물들에게 진화적으로 유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실험은 관념이 중독성 약물과 비슷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217p) 요컨대 우리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쾌감과 연합 학습의 상호작용은 전형적인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다. 쾌감회로에 장기적 변화를 불러오는 경험의 힘 덕분에 임의적 보상물과 추상적 관념은 즐거운 것이 되었고, 이 현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문화를 탄생시킨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그 과정 때문에 쾌감은 중독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245p) 만일 도취성 쾌감이 중독과 분리된다면, 향정신성 약물 사용에 관한 우리의 법률적, 사회적, 종교적 규제는 어떻게 변할까? (중략) 쾌감을 주는 야구모자를 갖게 된다면 우리는 쾌감에 관한 도덕적 관념들을 재고해야 할 것이다. 만일 중독에 빠질 위험 없이 모든 종류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래도 우리는 절제를 미덕으로 볼까? 여전히 쾌감을 노동이나 희생을 통해 얻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할까? (중략)
그러나 결국 쾌감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는 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만일 쾌감이 도처에 존재한다면, 쾌감과 추상적 관념을 연합하는 인간의 ‘거대 능력’은 어떻게 될까? 소음의 홍수에 쓸려가버릴까? 만일 쾌감이 모든 곳에 존재한다면, 인간 특유의 목표들은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쾌감이 도처에 존재한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게 될까?
<고삐 풀린 뇌>, 데이비드 J. 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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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딴 생각, 혹시 내가 공부하겠다는 미친 생각을 갖게 된 이유가 이런 건 아니겠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