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읽고적는글]

2017년 6월 12일 · 존재와 시간

losenvex 2019. 9. 9. 22:50

 

개인은 소외되어도 무방한 우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삶의 주체이다. 실존론적 존재론은 개인의 구체적 삶을 사유의 중심에 놓고, 거기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구명하는 존재론이다.

 

일반 존재론이나 변증법적 존재론과 달리 이 존재론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으로부터 출발해서 존재 일반의 의미를 구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존재는 이 세상에 [내던져지듯이] 태어나서 이렇게 현사실적으로 살면서 자기를 가능성을 향해 기투하는 자이다.

그는 먼저 현존재의 전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죽음의 현상을 분석한다.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서 파악된다. 이것을 그는 ‘죽음에로의 선구’라고 한다. 이어서 그는 현존재의 본래성을 보증받기 위해 양심을 분석한다. 양심은 각자의 내면에서 부르는 소리 없는 말이다. 이에 귀기울임으로써 현존재는 자기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성(즉, 선구적 결의성)이 증거(된다.)…중략… 존재는 ‘탄생과 죽음 사이’로 신장된, 즉 생기의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가장 큰 문젯거리로 삼고 있는 존재자를 골라서 이것을 현존재(das Dasein)라고 한다. 뒤집어서 말하면 존재의미의 구명은 오직 현존재의 존재의 구명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존재적 우위 – 현존재는 실존한다.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 가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자이다.
존재론적 우위 – 현존재는 존재론이 가능한 기반이다. (현존재의 존재이해로 인해 존재이론이 가능하다)

 

구체적 삶 속에서 현존재가 존재자를 도구로 삼으면 용재자가 되고, 단순한 관찰의 대상으로 대하면 전재자가 되는 것이다.

 

현존재는 본래적 존재로 사는가 비본래적 존재로 사는가 하는 삶의 양식으로 스스로 선택한다.


현존재는 어쨌든 살고 있으면서 자기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것을 실존(Existenz)이라고 한다. (중략) 자기의 실존 자체에 대한 이런 주도적 이해를 실존적(existenziel) 이해라 한다.

 

근대 이후의 심리학은 인간을 실존하는 ‘나’로서가 아니라 동물의 한 종으로서 자연과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현존재가 존재자로 하여금 <있게> 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 용재자를 목적과 수단 계열상 쓰일 자리에 <적합하게> 한다는 것이다. __ 즉 현존재가 도구를 적합하게 사용하여 의의를 갖게 하는 것을 ‘유의의화 작용’이라 한다. __ 이런 유의의성이 세계를 세계이게 하는 것, 즉 세계의 세계성이다. 이렇게 보면 세계는 현존재를 중심으로 조직된 의미의 그물이다.

 

공동 현존재는 환경세계적으로 만나는 [현존재라는] 존재자의 독자적 존재 양식이다. 독자적이라 함은 타자들은 용재적 존재자가 아님을 말할 것도 없지만, 앞에서 말한 인식의 대상으로서 전재적으로 있는 그런 주관도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은 애초부터 홀로 있을 수 없는 존재자이다.

 

세인이란 현존재의 중성적 실존방식이다. 세인이란 평균적 일상성 속에서 우선 대게 살고 있는 사람 일반, “모든 사람이면서 동시에 아무도 아닌 사람들”을 가리킨다. __ 이렇게 사람들은 일상적으로는 환경세계에 몰입해서 부지불식간에 남들에 의해 지배되어 자기를 망실한 채 살고 있다. 이것이 일상성의 평균화라는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이해는 곧 가능성이라는 것이요,__ 현존재의 실존론적 가능성이다. 현존재는 가능적 존재이다. __ 현존재가 이렇게 앞을 향해 자기를 기획하는 것을 그는 기투라고 하는데, 이것이 존재 가능이다. 이 점에서 ‘이해’는 내용상 기투라는 말과 같다. 기투는 사람의 존재방식 자체가 전향적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퇴락은 현존재가 우선 대게 세인 속에 몰입해 있는 비본래적 존재양식일 뿐 결코 가치론적 개념이 아니다. __ 퇴락은 현존재가 평균적 일상성 속에 던져져 있음(피투성)을 개시한다.

 

언제나 만사가 일어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 즉 늘 새로운 나날이지만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인 그 일상적 오늘, 거기에서의 세인의 존재양식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비본래성이란 1. 현존재가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여 기투하지 않고, 세계의 해석-나에 대한 남들의 해석-에 따라 자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들과 같은 존재양식을 취하는 것은 일단 비본래적이다. 2. 존재자를 전재자로 관찰하는 경우를 나타낸다. __ 요컨대 존재자에 얽매인 현존재의 존재양식은 모두 비본래적이다.

 

일상적으로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유의의성으로서의 세계에 의존해 있는데 불안에서는 이 유의의성이 붕괴되고 세계는 무의의해지는 것이다. 즉 불안 속에서는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실존하는 그 세계가 무의의성 속에 침몰하고 만다. 세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무의의해지는 것, 그것이 불안거리이다. 불안의 대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데도 없다.’

 

불안 가운데 있는 현존재는 차라리 퇴락적 세인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요컨대 불안을 통해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양식(본래성과 비본래성)을 분명히 선택한다. 그러나 불안 때문에 현존재는 비본래적으로 될 수 없다. 비본래적 세계-내-존재인 세인은 편안한 자신감과 자명한 <느긋함>을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 속에 끌어들이지만, 그러나 불안은 그런 비본래성을 거부하고 본래적 자기로 돌아가도록 한다. 불안은 자기 회복의 계기인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발견하면서 있음’이라고 정의 했거니와, 이것은 다름 아닌 현존재의 한 존재방식이다. __ ‘발견하면서 있는’ 것은 현존재 자신 뿐이고, 그 외 것들은 현존재에 의해 발견되어 있는 [피발견성]인 것이다. __ 즉 개시된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진리는 근원적 진리인 현존재에 근거한다.


진리는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만, 또 그 동안에만 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진리나 비진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진리는 궁극적으로 현존재의 개시성에 그 근원을 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현존재의 전체성은 현존재의 끝인 ‘죽음(Tod)’이 보증하고, 본래성은 양심이 증거한다.__ 현존재의 전체 존재는 죽음이 보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으면 이미 현존재가 아니다. 죽기 직전까지를 우리는 현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즉 죽음에는 ‘아직 아님’이라는 미제가 남아 있어야 한다.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확실하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인데, 이런 가능성을 본래적으로 내 것으로 하는 것을 그는 <<죽음으로의 선구>>라 한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어 있다.>

현존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존재의 존재의미로서의 시간성이라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시간성이 비로소 현존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하여 ‘선구’는 현존재를 그 극단적 가능성인 죽음에 직면시킴으로써 그 본래성을 보증하고, ‘결의성’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개시한다. __ 선구적 결의성은 현존재로 하여금 자기의 가장 극단적인 존재 가능을 향한 근원적 존재가 되게 한다.

 

- 죽음을 향해 자유롭다는 것만이, 현존재에게 단적으로 목표를 주고, 실존을 그 유한성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렇게 파악된 실존의 유한성은 유쾌함, 경솔함, 태만 등 분출하는 신변적 [퇴락] 가능성들의 무한한 다양성으로부터 현존재를 도로 끌어당겨서 그의 숙명의 단순성 속으로 밀어 넣는다. 숙명이란 본래적 결의성 속에 놓여 있는, 현존재의 근원적 생기를 가리킨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가 숙명의 양상으로 실존할 수 있을 때 그는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