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20041193 김태형
해방과 함께, 그리고 근대의 시작과 함께, 이 나라가 처해진 상황은 반듯한 이분법의 세계였다. 다행히 체제와 그 체제의 영향을 받는 지리적인 분열이라,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양쪽의 체제를 도입한 소위 기득권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색을 사람들에게 입히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를 골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허구와 허구의 싸움이었을 뿐이다.]
그러던 중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같은 색을 입은 사람들끼리 이데올로기라는 명분으로 모여 나와 다른 색을 입은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목숨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둘 중 하나를 택했고, 동시에 이쪽이 아닌 저쪽을, 우리가 아닌 저들을 죽이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결국 양쪽으로 분열된 두 나라는 아직도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서로를 용서하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남쪽의 사람들은 전쟁의 트라우마로 나와 같은 사람들끼리 뭉치야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되며, 이 결과로 민주주의 아래 발생할 수 있는 다양성이 제제를 받는다. (물론, 독재 체제의 강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의식화한 이유도 존재한다.)
이렇게 한 쪽으로 뭉쳐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계를 강화해 나가며 경계 바깥의 사람들을 배척하고, 경계 밖으로 이탈한 사람들을 배신자로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강압적 제제로 획일화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 여파로 경계에서 밀려나간, 경계를 벗어난, 경계 밖에 존재하던 사람들은 또 다른 집단을 형성하며 남쪽은 새롭게 이분화 된 사회를 맞는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은 이분법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데, 집단의 기반이 사상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논리로 무장한 집단은 이쪽과 저쪽의 사이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고, 그 영역에 존재하던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가까운 쪽으로 발을 옮기던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상적 디아스포라의 탄생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고 이쪽과 저쪽의 싸움이 팽팽해지며 둘 사이의 층도 점점 두터워진다. 그들은 양쪽을 다 좋아하기, 싫어하기도, 무관심하기도 한 사람들이었다.
바야흐로 이분법의 사회에서 스펙트럼의 사회로 진입해나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송두율 교수의 ‘경계인’에 대해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경계란 양분화 된 사회의 구분선이다. 하지만 실제로 양분화 된 사회에 개인이 경계에 존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파란색과 빨간색의 확률은 1/2이지만, 그 경계의 확률은 정의 할 수 없는 것처럼....) 게다가 송두율 교수는 이미 노동당에 이름이 올라간 상태였으니, 자신이 아니라 말해도 사람들이 보기엔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보와 보수 구분 없이 말이다.) 만약, 송 교수가 입국 후에, ‘한나라당’에 당원 지원을 했으면 어땠을까. 이미 달려있는 노동당 꼬리표가 문제라면 그 반대되는 꼬리표를 달아버리면 그만이고, 이 과정에서 결과에 대한 책임을 한국의 보수진영에 넘겨버리는 셈이 되어 버릴 테니 말이다. (양쪽의 꼬리표를 다는 것이 ‘전향’을 의미하지도 않을 것이고, 거절된다면 이는 보수진영의 포용력이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송두율 교수는 그러지 못했고, 결국 다시 독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사건을 통해 국보법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그 결과로 국보법 폐지를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 아무튼 이래저래 사상 부분의 글이 길어졌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정치적 면을 제외하고도 한국사회는 수많은 디아스포라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들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이라 볼 수 있는데, 한 개인이 다수와 다르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경우가 생기고 이러한 과정에서 소외되는 개인 혹은 계층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르다’와 ‘틀리다’를 언어적으로 헷갈려하는 점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후배] 내년에 봐, 안녕 님의 말 :
형
[후배] 내년에 봐, 안녕 님의 말 :
제가 느낀 것 중에 하나가
[animaego] 님의 말 :
ㅇㅇ?
[후배] 내년에 봐, 안녕 님의 말 :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요
[후배] 내년에 봐, 안녕 님의 말 :
적어도
[후배] 내년에 봐, 안녕 님의 말 :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남들과 함께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 같아요
게다가 동질성에서 벗어난 정도가 클수록 피해는 커지는데, 이는 다수와 소수의 힘 싸움의 구도가 되기 때문이다. 이 때,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마저 힘 있는 쪽에 서길 원하는데, 이는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한 반사적 행동이다. 최근엔 사회의 규모가 커감에 따라 개인뿐이 아닌 ‘계층’이 다수에 의해서 소외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장애인, 혼혈, 결손 가정 등)
개인적으로 느끼는 심각한 점은 바로 ‘경제력’에 의한 디아스포라의 발생이라 생각한다. 경제 성장을 이루며 경제력이 삶의 지위를 결정한다고 느끼는 ‘자본주의 병폐’가 사회에 만연해 있다 보니, 내 경제력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나보다 잘 버는 사람을 선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틀렸다고 볼 수도 없고, 세상이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경제력의 기준으로 소외된 사람들은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며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에도, 이런 상황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외면하고 심지어 ‘가난함’을 비난하기까지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력’은 곧 ‘생존’과 직결된다. 즉, 사람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No one was left to speak up
-마르틴 니뮐러-
They came first for the Communists,
and I didn't speak up because I wans't a Communist.
Then they came for the Jews,
and I didn't speak up because I wasn't a Jew.
Then they came for the trade unionists,
and I didn't speak up because I wasn't a unionists.
Then they came for the Catholics,
and I didn't speak up because I was a Protestant.
Then they came for me,
and by that time no one was left to speak up.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해나가는 것이지 사상적, 경제적, 문화적 등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나와 너를 가르는 기준을 없애고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경계를 지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은 있지만 ‘틀린’ 사람은 없다. 상황의 일면을 보고 단정하지 말고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수용할 것. 경계를 인식하고 만드는 주체는 ‘나’이기에 경계를 극복하는 것도 나의 몫인 것이다. 스스로의 능력에 한계를 만들지 않아야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힘내요. Postechian.
결론이 이상해 -_-;;
<네게 강 같은 평화>, 공지영
20041193 김태형
1. 작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세상의 변화와 여성의 현실을 투시하는 섬세한 문학적 감성과 속도감 있는 문체로 주목받아왔다.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별들의 들판』,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착한 여자』 『봉순이 언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산문집 『상처 없는 영혼』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등을 출간했다.
2. 작품
<네게 강 같은 평화>는 C일보에 재직하고 있는 최영명이라는 기자가 베를린에서 임수경 방북에 연루된 까닭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사촌형 수명을 만나는 이야기다.
(소설집 <별들의 들판> 해설에서 발췌, 방민호)
3. 자료
송두율 (宋斗律, Song Du-yul, 1944년 10월 12일 ~)
한국계 독일인으로 독일 뮌스터 대학의 사회학, 철학 교수로 사회민주주의자이다.
[편집] 생애
송두율은 1944년 10월 12일 일본 도쿄 아라가와 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제주도 출신으로 아버지 송계범은 동경물리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물리학부에서 근무하였다.
송계범은 한국 전쟁 이후 전남대학교 물리학과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송두율은 1945년부터 1960년까지 광주에 거주하며 광주 중앙초등학교와 서중학교를 졸업했다.
1960년 서울로 이주해, 경기고등학교 입시에 도전했지만 낙방하고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동고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사회학 교수가 된 최재석이었다. 교사 송찬식의 권유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1963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하면서 대학 시절 59학번인 김지하와 알게 된다.
1967년 독일로 유학해 1972년 위르겐 하버마스의 지도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3년 뮌스터대학의 사회학과에서 조교수로 채용되어 정치경제학, 사회학방법론, 후진국사회학을 강의했으며, 뮌스터에서 정정희와 결혼하여 준과 린 두 아들을 낳았다. 북한을 처음으로 방문하였으며 북한 노동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이후 총 18회 북한을 방문하였다.
1974년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조직하여 의장을 맡았으며, 본에서 벌어진 유신 독재 반대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다.
1977년 베를린 자유대학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1981년 사회주의에 대해 내재적 방법으로 비판적인 분석을 한 논문 '소련과 중국'을 발표하였고, 1982년 교수자격논문을 마무리하여 교수자격을 받았다.
1988년과 1989년에는 미국의 롱아일랜드대학 철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였다.
1991년에는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강의하였으며 김일성 주석과 대면하였다.
1994년부터 베를린 홈볼트대학 교수로 채용되었다.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였으며, 김일성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북한을 방문하였다.
2003년 한국에 귀국했으나, 국가보안법에 의해 조선 조선로동당 당원이라는 혐의를 받아 기소되었고 재판부(서울중앙지법, 재판장 이대경 부장판사)는 7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항소심에서 그는 특정 정치적, 사상적 집단에 귀속시키려는 주장에 대해 강력 거부하고 '경계인'으로서의 입장을 견지했으며, 재판부(서울고법, 재판장 김용균 부장판사)는 기소된 사건 내용중 방북사실을 제외한 간첨혐의 등 대부분을 무죄로 판정하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였고, 그날로 송 교수는 구속 9개월 만에 석방되었으며 그는 부인과 함께 독일로 출국했다.
2008년 4월 17일 국가보안법위반 혐의에 대한 상고심(2004도4899)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편집] 사회 운동
60년대 독일 유학 중 박정희 정권이 시도한 유신 체제 개헌 반대 운동을 주도하여, 반체제 인사로 낙인이 찍혔다. 이후 독일에 머물며, 남한과 북한 사회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며 일련의 저서를 썼다. 그 안에 북조선 사회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내재적 접근론을 내세우며 한국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5년부터 베이징에서 남북의 학자들이 만나 학술적인 교류를 갖는 남한/북조선 학술 회의를 주도했다.
임수경(林秀卿, 문화어:림수경, 1968년 11월 6일 ~ )
대한민국의 여성 통일운동가, 사회운동가·방송인·언론인이다. 학생운동가로 1988년 노태우 정권 당시 목사 문익환 등과 함께 방북, 이후 북조선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밀입북하여 크게 알려졌던 인물이다.
[편집] 생애
임수경은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랐으나,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에 입학한 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등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989년 북조선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전대협 대표로 선발되었고, 전대협 측은 비밀리에 파견 계획을 세웠다. 임수경은 서울을 떠나 출국했다. 그는 출국시 행선지를 일본으로, 출국 목적을 관광으로 밝혔다. 그러나 동독 동베를린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들어갔다. 그가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대한민국에서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후, 문익환 목사,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였고, 동시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임수경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92년 12월 가석방되어 풀려났고, 1993년 사면되었다. 1993년 8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뒤늦게 졸업했고, 이후 서강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미국 코넬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인권학을 공부했다.
임수경은 그 후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지내고 있으나, 세간에는 크게 노출되지 않으며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 한편 2005년에 필리핀에서 어학연수 중이던 초등학생 외아들이 현지에서 사고로 익사하는 사건이 있었다[1]. 이 사건이 보도되면서 임수경의 방북 전력과 관련 지은 악성 댓글이 달렸고, 임수경은 댓글을 단 네티즌을 고소하여 이들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2]. 악플러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악플러들의 정체가 10대, 20대로 추정했던 것과는 달리 30대 이상의 의사, 변호사, 시민단체운동가, 공무원 등 전문직 종사자들인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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