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읽고적는글]2019. 9. 4. 22:41

 

아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미경, 내가 사랑하는 문장을 가장 많이 써준 소설가님

요새 글이 뜸하다고 생각했는데 암투병 중이셨군요.

황량한 사막에 장식된 조화처럼 아름다운 표현을 사용하셔서 존경했던 작가였습니다.
건조하지만 화려했던 문장을 좋아해서 소설도 많이 샀었는데,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중2병 같을 수 있겠지만, 아끼던 문장을 공유합니다.
한국 현대문학. 많이 읽어주시길 바라면서,

 

ㅡㅡ
사랑에서 비극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니?
결국 사랑의 비동시성이야.

한 사람은 이직 뜨거운데 한 사람은 (중략) 싸늘한 거지
//
화장기 하나 없는 웨이트리스가 건넨 샌드위치는 딱딱하고 요플레는 차갑다. 각성이 필요하지 않아도 커피를 들이킬 수밖에 없는 모래같은 끼니다.
//
반감기가 서로 다른 사랑 때문에 아파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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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제가 나오기 전엔 그냥 잠이 안오는 것이었지 불면증은 아니였어. 프로작이 나오면서 우울함은 우울증이 되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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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너무 친절해. 천천히. 익사한 시체가 부패가 진행되면서 물 위로 떠오르듯 그렇게...... 친절한 건 뻔하고, 뻔한 건 지루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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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나 역시 그림 속의 그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귀를 막고 싶다. 그 방은, 너무 날카로워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고음역의 절규로 가득차 있는 듯하다.
ㅡ 정미경 <밤이여, 나뉘어라>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상상을 즐기는 편이다.
//
목이 잘린 채 깨끗하게 씻긴 배를 열고 있던 닭. 크고 작은 노른자들이 조랑조랑 엉여 있던 뱃속.
//
나의 어디가 좋아?
모르겠어.
말해 줘.
모든 게 좋아. 너의 모든 것.
그렇게 많이?
고개를 갸웃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
온몸의 수분이 말라버린 듯, 무릎이 입 안이 어깨가 눈알이 파삭거리며 함부로 발굴된 미라처럼 한순간 석아내렸다.
//
끈끈한 잠의 바다 속으로 가려움마저 익사하고 마는 것이다.
//
못난 영혼일수록 사소한 말에 상처받는다.


ㅡ 정미경, <나의 피투성이 연인>

Posted by losenvex
감상[읽고적는글]2012. 2. 17. 04:06

소년은 울지 않는다.

20041193 김태형

 

김영랑님의 시구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늘 정미경의 소설을 추천한다. 그녀의 소설은 너무 차갑고 아름다워 읽다보면 마치 해변의 모래알을 씹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너무 슬퍼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 소설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심히 그 슬픔을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희망도, 행복도 아닌 슬픔임을 가르쳐주듯이. 그리고 그만큼 담담하게 슬픔과 동행한다. 때때로 소설을 읽고 나면 그들과 비교하여 위안을 얻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래도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내가 이 정도는 아니니까,

내가 겪는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한 4인 가정을 소개하고 있다. 같은 학교 한 학생의 자살로 인해 ‘히키코모리’가 된 아들과 그 아들이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자신의 잘못이 무엇이었을지 되뇌는 엄마, 갑갑한 마음에 칼로 문을 찍고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은 아들을 위한다고 생각하며 답답해하는 아빠, 그리고 그런 부모를 바라보며 서운해 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는 딸은 각자의 독백을 통해 서로를 말한다. [엄마-딸-아들-아빠-엄마-딸-엄마-아들]순으로 각기 다른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 소설에서, 그들은

...가족임에도 서로를 모르고, 가족이기에 서로를 잘 알고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징은 바로 ‘생각과 행동의 모순’이다. 의사인 자신의 일이 얼마나 괴롭고 힘겨운지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 아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걸으라는 아버지, 아들이 공부에 지치고 힘겨워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아들에게 신문의 사설을 읽히는 어머니, 그런 부모가 지겹고 원망스러우면서도 자신의 남자친구에게는 부모와 다를 바 없는 태도를 취하는 딸, 그리고 공부가 싫어 스스로 방에 가두었지만 게임을 하면서도 ‘잘’하려고 메모를 하는 아들까지,

...가족들은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고 그만큼 닮았다.

 

 

우리 어릴 때 엄마아빠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했잖아. 그래놓고는, 그렇게 길들여놓고는, 어느 날 갑자기 탁월하고 맹목적인 어떤 괴물로 변신하기를 기대하기 시작했어. 오빠는, 나는, 그 사랑이 끔찍하다, 엄마.

 

우리말에는 “애증”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랑과 미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는데, 어릴 때는 이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을까? 어떻게 [끔찍하게 사랑을 쏟아 붓다가는 어느 날 갑자기 아득한 꼭대기 위로 밀어대는] 걸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다행히 사랑도 하고 아프기도 했던 지금의 나는 그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만큼 미워할 수 있는 것이라고.

Posted by losenvex
감상[읽고적는글]2012. 2. 14. 00:50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상상을 즐기는 편이다.
 

--. 목이 잘린 채 깨끗하게 씻긴 배를 열고 있던 닭. 크고 작은 노른
자들이 조랑조랑 엉여 있던 뱃속.
                               ---중략---
 그의 머리 속에서 미성숙한 난황처럼 엉겨 있던 생각들을, 단단함
도, 껍데기도 만들어지지 않은 그것들을 꺼내놓자고? 그의 배를 쪼
개서?
 

 유선은 눈을 꾹 한 번 감았다 뜬다. 결정적인 순간을 놓쳐버린 흐리
멍텅한 자신에게 짜증이 난다. 삶은 이렇게 차갑고 날카롭게, 파도처럼 끊임없이 맨살에 부딧쳐올 모양이다.
 

 그는 먼저 써놓고는 하염없이 잘라내는 스타일이다.
 

나의 어디가 좋아?
모르겠어.
말해 줘.
모든 게 좋아. 너의 모든 것.
그렇게 많이?
고개를 갸웃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향해 전화기를 집어던질 수도, 얼굴에 손톱자국을 낼 수도 없
는 곳에 존재하는 사람에게 분노를 느껴야 하는 자신.
 

--------. 이건 제 팔에 스스로 칼을 꽂은 자의 비명소리가 가득한
기록. 스스로 그 비명소리를 즐기는 자의 기록일 뿐이었다. 온몸의 
수분이 말라버린 듯, 무릎이 입 안이 어깨가 눈알이 파삭거리며 함
부로 발굴된 미라처럼 한순간 삭아내렸다.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밤이 되면 스멀스멀 시작하는 것이다.
통증보다 견디기 괴로운 것이 지독한 가려움이란 걸 알게 되었다. 가려운 곳은 피부가 아니다. 몸속 어딘가, 피부 한 꺼풀 아래의 어느 지점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일어나 앉아 손톱이 살을 파고들도록 긁어대면 가려운 곳은 점점 더 깊은 데로 내려간다. 미친 여자처럼 집중하여 제 살을 긁어재자 보면 각성제를 먹은 것처럼 정신까지 맑아졌다.
 

끈끈한 잠의 바다 속으로 가려움마저 익사하고 마는 것이다.
 

못난 영혼일수록 사소한 말에 상처받는다. 
누구에게도 귀하지 않은,
도움이 안 되는,
우습게 보이는,
지겹게 발목을 붙드는 인간
 

ㅡ엄마, 아침이야?
이거하고 싸우다니.
ㅡ아니야. 저녁이야. 엄마가 도넛 해줄까?
-아니. 엄마 피곤한데 됐어.
또 판정패.
 

  ㅡ일기를 쓸 때 사람들은 누군가가 볼 것을 무의식 속에서 인식하
고 있는 거 같아. 말하자면 일기란 어떤 면에서 자기 검열을 이미 거
친 글이야. 난 그런 거 같아.
 

 유선의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밀려 올라와 목구멍을 틀어막는다.
  그의 모든 걸 까발리고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스캔들의 가운데 놓
이게 하고 싶어. 어떠한 변명도 하지 못하는 그의 무력함을 한 껏 비
웃으며.
 

  ㅡ자기가 쓴 글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글 쓰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 언젠가 한 번 다시 전등사에 오자. 그의 몸이 유선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등이 아파. 나도 무릎이 아파. 유선은 웃었다. 엉덩이에 모래가 박혔어. 내 팔꿈치에도 모래가 박혔어. 유선은 다시 웃었다. 그의 몸이 흔들렸다. 누가 보겠어. 상관없어. 그가 몸을 움직이자 경사진 비탈 아래쪽으로 몸이 쏠렸다. 작은 이파리들 사이로 흘러든 봄빛이 눈을 찔렀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개인적인 고통을 증언하는 건 
스스로 모자라는 사람임을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빛을 내는구나.
  들리지 않는 탄성이 숨어 있었구나.
  난 몰랐어.
 

연약한 것은 추한 것.
 

때때로 자신의 전화번호가 낯설 듯,
깨어진 거울 속의 얼굴이 유선에게 낯설다.
 

  당신은
언제까지 나를 물어뜯으며, 나의 연인으로 남아 있어야 해. 피투성이의 연인, 잔혹한 연인. 당신이 특별히 가혹한 사람이란 생각은 안 해. 모든 연인은 더 사랑하는 자에게 잔혹한 존재이니까.
 

대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
진짜 사랑은 빠져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아무것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지면
 제게 전화하세요."
 
Posted by losenvex
감상[읽고적는글]2012. 2. 13. 14:03

화장기 하나 없는 웨이트리스가 거네둔 샌드위치는 딱딱하고 요플레는 차갑다.각성이 필요하지 않아도 커피를 들이켤 수밖에 없는 모래 같은 끼니다.
 

모든 걸 다 가져본 자의, 제겐 너무 쉬운 삶에 대한 희롱일까.
 

반감기가 서로 다른 사랑 때문에 아파본 사람들
 

  글쎄, 의사들은 저희들이 고칠 수 있는 건 병이라 부르고 못 고치
는 건 본성으로 분류해 버리지. 이를테면 외로움이나 질투, 슬픔 같
은 건 병이라고 부르질 않잖아. 수면제가 나오기 전엔 그냥 잠이 안
오는 것이었지 불면증은 아니였어. 프로작이 나오면서 우울함은 우울증이 되었잖아.
 
 
  "영화는 삶의 그림자일 뿐이야. 그림자는 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림자다. 무언가를 굳이 말하려 하지 말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그려서, 그 무언가를 떠오르게 해봐. 넌, 너무 친절해. 천천히. 익사한 시체가 부패가 진행되면서 물 위로 떠오르듯 그렇게.......친절한 건 뻔하고, 뻔한 건 지루한 거야."
 
 
 제 입에서 나온 절규가 제 귀에 들리지 않도록 귀를 틀어막아야만 하는 팔.... 한순간, 나 역시 그림 속의 그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귀를 막고 싶다. 그 방은, 너무 날카로워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고음역의 절규로 가득차 있는 듯하다.
 
 
----------------------------------------------
 
   사랑에서 비극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냐?
               
              결국 사랑의 비동시성이야.

   한 사람은 아직 뜨거운데 한 사람은  ---중략---  싸늘한 거지.


 
Posted by losenv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