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당신은 바쁘다.
당신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특별한 기대나 별다름 설렘
도 없이. 외지고 남루한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무엇 때문인지
여태 단 한 번도 대출된 적 없어 존재감마저 희박해진 책. 한 번 훑어보기만 하면, 두 번 다시 들춰볼 일 없을 것처럼 평범해 보이는 책. 당신은 나에게 그런 책이었다. 어떻게 찾아오게 되었냐고 묻자 당신은 말했다.
당신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 말해 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다.
당신은 일러두기도 목차도 없는, 독자를 위한 배려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책인 셈이었다.
당신은 여러모로 읽어내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서툴게 변역된 책
처럼 문장은 아리송했고 문맥은 쉬이 연결되지 않았다.
시시할 것이라는 지레짐작과 달리 당신이라는 책이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당신이라는 책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처럼 첫 문장부터 독자를 긴장하게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호사스런 장정으로 독자를 압도하거나, 자극적인 삽화로 독자를 현혹하는 책도 아니었다. 별다른 기대도 이렇가 할 사전 정보도 없이 무심코 읽기 시작한 책일 뿐이었다. 더구나 당신이라는 책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몇 번이고 책장을 덮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일단 도입부의 관문을 통과하자 생소했던 문체는 눈에 익었고 인물들의 성격은 선명해졌으며 스토리는 핵심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더 이상 독자를 마음 불편케 하는 책이 아니어서 이렇게 속삭인다. 나를 읽어봐. 주저하지 말고 나를 읽어봐. 순진한 당신의 속삭임은 차라리 외설스러울 지경이다.
자신감이 결여된 젊은 여자들 중에는 아무 남자와 잠으로써 자신의 하찮음을 확인하려드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어떤 남자와도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쓸모없음을 증명하려는 부류도 있다
해독되지 않는 당신의 문장이 나는 곤혹스러웠다.
나는 꼼꼼하고 조심스럽게 당신을 읽는다.
당신을 읽는 일은 점점 흥미진진해졌다.
빛나는 생기와 샘솟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진 당신의 문장은 당당해서 아름다웠다.
그날 저녁 당신은 어떤 결말을 원했던가.
나는 다시 당신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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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적인 독자들이 갖고있는 오래된 선입견 중 하나는 책 속의 주
인공과 저자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런 독서법의 폐해는 정답을
찾기 위해 교사의 눈치를 보는 학생처럼 저자의 권위에 짓눌린 나머
지 책에 자신을 자유롭게 내던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경험담인가. 저것은 작가의 상상력인가. 독서량이 그리 많지 않은 당신도 예외는 아니어서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의식하느라 정작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읽어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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