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읽고적는글]2012. 2. 17. 04:26

고통을 대하는 방법

20041193 김태형

 

‘모든 사람은 각자의 고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비약일까?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하고 난 후의 주제를 고통으로 잡고 나니 필요한 전제에 대해서 확신을 하기 어렵다. 너무 당연해서일까? 아무튼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고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때문에 그 고통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삶도 다른 방식을 띄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라는 소설을 통해 개인이 고통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와 그 변화 과정에서 타인의 고통을 접하면서 겪는 일들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1. 짧은 시간에 척척

그는 불면의 밤을 겪으며 고통이 없는 곤충들에 대해서 부러워한다. 매일 밤 코끼리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는 고통은 다시 불면을 부르고 그 불면이 다시 고통이 되는 거대한 순환 고리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잠이 올 때까지 걱정하는 일들의 목록을 적어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여기서의 나는 고통을 일차적으로 피하는 형태를 취한다. 코끼리의 등장을 피해 정신을 다른 곳에 집중하려 ‘걱정하는 일들’을 적어 내려간다던지 혹은 잠이 올만한 지루한 책을 골라서 읽는 등의 행위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다 우연인지 (혹은 필연인지) “암환자를 위한 생존전략”이라는 책을 통해, 의사와 대화하는 암환자를 위한 테크닉인 ‘거울 기법’과 숙면을 돕는 ‘산책’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2. 코끼리도 재울 수 있으며

여기서 그는 새로운 방법(산책)을 통해서 고통을 잊어보려 하지만 혼자서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결국 여동생과 함께 산책에 나서지만 단순히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만을 위해 여동생을 필요로 했고, 때문에 자신의 고통에 대한 대화가 이뤄지지 못했기에 코끼리를 피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간다. 물론 산책으로 인한 육체적 피로로 오랜만에 수면을 취할 수는 있었지만, 그 역시도 오래가지 못하고 도중에 잠에서 깨고 만다.

여기서 그는 다시 “암환자의 생존 전략”을 읽게 되고 통증을 공으로 치환하는 방법을 통해 고통을 외면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고통을 스스로 다룰 수 있는 태도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이는 고통을 다루는 방법에 그치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의 크기만을 확인 할 뿐, 역시 그 고통을 인정 혹은 극복하는 것에는 실패한다.

 

3. 침대에서는 잠만 자고 섹스만 하고

[다음 날, 그는 걱정하는 일들의 목록이 적힌 A4용지를 뒤집어 거기에다가 친구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의 고통을 혼자서 해결하는 방법에서 타인과 함께 고통을 극복하려는 과정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만난 친구와의 대화에서 드디어 나는 내 고통에 대해서 상대방에게 말하기 시작하지만, 외상후증후군 대화를 통해 내 고통을 타인이 헤아리기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산책’과 ‘거울 기법’을 통해 타인과 소통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다행인 것은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타인에게도 고통이 존재하며, (물론 백혈구 정도의 크기지만,) 고통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내 고통이 나에게는 지구와 같더라고 그것이 타인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점([“고통, 아아, 그 고통.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과 고통의 근원인 코끼리가 사실은 [있다고 생각하는 하지만 증명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드디어 고통을 인정하게 된다. 더불어 그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것도 울어버리는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꺼이꺼이. 코끼리가 심장을 밟아서 아픈 건지, 이해하지 못했던 그녀를 생각하느라 슬픈 건지도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그렇게 꺼이꺼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러기들처럼.]

 

4. 결국 혼자서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며

아홉 명의 친구들을 만나서 고통을 확인하고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더라도 그것이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이 되지는 못한다. 서로에게 고통이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게 해주지만 이를 극복하는 것은 결국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불편했던 건축사 친구를 떠나보내고, 또다시 등장한 코끼리를 향해 그는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디뎌] 본다. 드디어 코끼리를 이해하려는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극심한 고통과 종래엔 그녀처럼 죽을 것이라는 공포까지 겪게 된다. 하지만 비를 맞으며, 하늘을 바라보며, 코끼리와 대화하며, 고통이란 것도 결국은 자신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닌 수용하는 것이 진정으로 고통을 극복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이자면, 그가 붙잡지 못했던 그녀, 이제는 죽어버린 그녀가 코끼리의 모습으로 그에게 고통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5. 거리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될 것이다

이제 그는 코끼리와 함께 생활한다. 도망치지도, 외면하지도 않으면서. 물론 그 코끼리가 언제다시 고통을 줄지는 모르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고 도망친다고 달라질 일도 아님을 알기에…….

내 고통을 이해해 줄 친구가 아닌 [한 번이라도 안면이 있거나 혹은 다시 일을 시작하려면 어차피 만나야할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다른 이들도 나름대로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매머드든 오랑우탄이든 상관없이. 그러다 “암환자를 위한 생존전략”을 쓴 Y씨를 만나게 된다.

“그렇죠. 언제라도 나는 죽을 수 있다는 공포.119 구급차가 이 고궁 안쪽까지 들어와서 바닥에 쓰러진 나를 태우고 가는 환상. 구급차가 들어온다면 과연 어디로 들어올까? 심지어는 그런 것도 궁금해서 관리사무소에 문의한 적도 있어요.”

그리고 Y씨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 Y씨는 고통의 근원이 심리적인 나와 달리 ‘암’이라는 육체적인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 고통을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했다는 점에서 나와 유사한 혹은 나보다 앞선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위의 인용을 보면 그러한 면을 확인할 수 있는데, 죽을 수 있는 공포를 말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녀는 이미 고통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Y씨와 대화를 하면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산책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그 고통의 근원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상관없이, 오랑우탄이든 매머드든 코끼리든 상관없이, 누구나 고통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의 고통을 이해할수록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이나마 더 알아갈 수 있기에, 종래엔 모두가 고통을 웃으면서 받아들이기 위해서……. 

Posted by losenvex
감상[읽고적는글]2012. 2. 17. 03:41

<뿌넝숴(不能說)>, 김연수

20041193 김태형

1. 작가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강화에 대하여>외 4편으로 등단했으며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 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으로 2001년 동서문학상을 받았으며, 단편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때>로 2003년 동인문학상을, 단편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2005년 대산문학상을, 단편소설 <달로 간 코미디언>으로 2007년 황순원문학상을, 단편소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가지 즐거움>으로 2009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2. 작품

 

과거 6.25 전쟁 때, 중공군 40군단으로 참전했던 군인이, 지평리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한 조선인 여성 구호원에게 구조되지만, 부상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 여자는 죽고 홀로 포로로 잡혀 살아남는다. 후에 작가를 만나 자신의 기억을 들려주고 있다.

 

3. 분석

 

1) 문체

전쟁 기억을 회상하여 이야기하듯이. 한시(漢詩)를 중간 중간 섞어가며. 뿌넝숴. 뿌넝숴.

 

2) 삶의 고발

6.25 전쟁으로 왼쪽 다리와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잃은 노인의 이야기.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은 기록될 수 없음을 말한다.

 

3) 삶의 이해

 

한편 제23연대는 3일 동안 4배가 넘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52명의 전사자와 259명의 부상자, 42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중략) 반면 지평리에서 미 제23연대에 의해 사살된 중공군은 포로 79명을 포함 5,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때 포로가 된 중공군의 진술에 의하면 지평리에 투입된 중공군은 5개사단에서 1~2개 연대씩 차출하여 총 6개연대가 투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The battle was a major turning point in the Korean War in that it marked the end of the CPVA holding the initiative. (중략) The fighting at Chi'pyong-ni established that UN and U.S. forces could withstand anything and everything that the Communists could throw at them. The CPVA never again held the clear strategic initiative in the war.

 


저는요,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되자.’라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딴에 좋다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할 일이라고는 공부뿐이었으니 다짐하려던 목표도 딱 그만큼이었을 거예요. 아는 것, 들은 것, 생각한 것이라고는 모두 책에 있던 것이고, 하고픈 것도 그 책에 제 이름 한 줄 더 추가하는 정도였죠. 피로 얼룩진 역사, 역사의 뒤안길, 역사의 소용돌이는 그저 영웅을 돋보이게 하는 수식어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사는 역사일 뿐, 그 앞에도 뒤에도 아무것도 없었죠.

대학에 왔습니다. 제겐 역사를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죠. 예상했던 길에서 반 발자국 어긋났지만 금방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죠. 하지만 그 어긋난 반 발자국에서 다른 세상을 만납니다. 제가 읽던 책엔 없는 세상이었죠.

거기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로 돕고 상처주고 사랑하고 아파하는 삶이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것들뿐이었어요. 알아가야 할 뿐이었죠.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살아가고, 사랑하고……. 제가 거기서 찾은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서로 행복할 수 있는 삶, 홀로 살지 않는 삶,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삶이 거기 있었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왜 하냐고요? 역사엔 없었거든요. 역사엔 없었어요. 거긴 기록만 있었습니다. 그 누구의 삶도 역사에 녹아있지 않았어요. 사실이 존재하고 사람들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있는 거라곤 나라, 전쟁, 날짜, 영웅 같은 것들뿐이었죠. 그제야 역사는 표면으로만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장막 뒤의 삶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저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가 진행될 때마다 누군가의 삶은 파괴된다는 거죠. 자발적으로 역사의 진행에 저항했든, 우연히 역사가 진행되는 기로에 놓여있었든, 파괴되는 삶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삶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아요. 누가 보상해주는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또 별로 없어요. 내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더 슬퍼요.

맞아요. 기록된 것이 역사고, 남은 것이 역사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보고 우리는 그 시대를 모두 알 수 있을까요? 당시의 사건? 알 수 있겠죠. 일이 일어난 배경과 과정, 결과는 자세히 적혀있으니까요. 사건의 주범, 시기, 영향 같은 것들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남겼거든요. 그래서 다들 ‘안다’고 합니다. 아는 거죠. 배웠으니까 아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일 뿐이에요. 그 역사를 격은 사람들의 삶은 교과서의 설명 몇 줄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나긴 유신시대를 버텨온 부모들을 지금 세대는 이해하지 못해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산화한 사람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죠. 그러니 6.25전쟁과 일제강점기를 이해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다만 그런 일이 있었음을 상상할 뿐이죠.

 

그럼 역사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역사는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역사의 사전적 의미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으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록’입니다.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글론 남긴 거지요. 근데 기록을 하려다보니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아 그럴 수 없게 됩니다. 모두 다 적기엔 종이는 부족하고 보관하기도 힘들었거든요.

그럼 그중에 뭘 기록 하냐고요? 적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사실이라고 판단되는 것들만 남겼을 겁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이 모두 옳다고 할 수도 없어요. 이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거든요. 정보가 부족해 잘못된 결론을 낼 수도 있고, 필요 없다고 생각되어 누락된 사실들도 있을 겁니다. 도중에 재정리를 하며 옮겨 적는, 혹은 번역하는 사람의 실수도 추가되고요. 악의를 가지고 기록을 고치는 혹은 추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게다가 보통의 역사는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남겨지기에 의도적으로 꾸며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남기기 싫어하니까요.

아니요. 그렇다고 역사를 모두 거짓으로 가정할 필요는 없어요. 모든 역사를 한 사람이 쓰는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왜곡한 기록도 다른 사료나 유물을 통해 진실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해요. 역사에 담기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요. 역사의 흐름이라는 핑계로 더 이상 피해를 입는 삶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때로는 그들을 위해 대신 싸워줄 수도 있고, 선대의 잘못은 우리가 사과할 수도 있는 겁니다. 후대에 거짓을 남기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역사는 수많은 삶과 죽음으로 쌓인 기록이에요. 그것을 단순화했다고 각각의 삶을 똑같다고 보면 안 되는 거죠. 기본을 이해하되 모두의 삶을 듣고 공감하는 자세가 필요한 겁니다. 

Posted by losenv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