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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Women Want
POSTECH 04 김태형
“What women want”는 남성 제품 위주의 광고회사의 ‘닉’이 여성의 속마음을 듣는 능력이 생기면서 자신의 승진 자리를 대신한 ‘달시’를 내쫓기 위해 그녀의 아이디어를 훔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영화이다. 이 과정에서 딸을 비롯한 다른 여성의 속마음까지 읽게 되면서 생기는 주변 일들을 함께 다뤄 지루하지 않게 시청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남녀 간의 일들이 진행되지만, 직장과 일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고서를 작성하고자 한다.
<Listen to her: 남성을 위한 가이드>
군대에서처럼 상명하복식의 업무가 이뤄졌던 기존과는 달리 직장에 여성의 진출이 많아지면서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남자의 업무매뉴얼에 추가되었다. 이에 따라 미처 적응하지 못한 남성들은 ‘닉’과 마찬가지로 여성들과의 관계가 어려울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바로 “Good Listener”가 되는 것이다.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줄 때까지 요구하는 남성과 달리 여성은 직접 요구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때문에 여성과 일을 함에 앞서 남성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영화 내의 ‘닉’은 감전에 의해 특수한 능력이 생기면서 여성의 속마음을 읽게 되며 결과적으로 가족, 직장 내의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의 남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들으려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현대사회는 아직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성이 먼저 들으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여성이 자신의 생각을 먼저 말하기는 쉽지 않다. 둘째로, 처음 말할 때 경청해야 한다. 영화 내에서 ‘에린’은 다른 업무를 원했고 이를 표현했지만, ‘닉’의 부주의로 무시당한 이후에는 그러한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괴로워한다. 또, ‘하나보다는 둘, 둘 보다는 다섯’이라는 표현을 ‘닉’이 사용했을 때, ‘달시’가 감동한 것처럼 여성이 처음 말하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이해한 바가 상대가 원하는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영화내의 대부분의 여성이 그렇듯 대화 안에 자신의 생각을 모두 담지 않는다. 상대의 기분상태, 억양, 몸짓에 담겨있는 숨은 뜻을 알지 못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으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깊이 있는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들을 유념하여 직장생활을 하면, 상사가 여성이라면 업무진행이 효율적일 것이고, 부하직원이 여성이라면 그들의 감각,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게 될 것이다.
<Talk to him: 여성을 위한 가이드>
남성 중심적으로 운영되는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여성이라면 가장먼저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아마도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하는 실수는 스스로 상대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되는 업무 외적인 일들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경우, 상대 남성이 그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시간낭비가 되며, 좋게 생각한다 해도 비슷한 잡일들을 도맡아 하는 결과가 생길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생기지 않으려면 여성은 자신의 생각, 원하는 바를 상대 남성에게 말해야 한다. 직장 내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으면 성과로 인정되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을 기준으로 공동의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또,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지 않아도 들어주는 친절함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직장이다.
때문에 여성은 자신의 의견을 구체화하여 피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도 상대방이 수용하지 못한다면 죽은 아이디어일 뿐이다. 실제로 ‘달시’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업무를 인정받아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 아이비리그를 나왔음에도 잡무만 처리하는 여성의 경우도 속으로 참지 말고 표현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이는 남자에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본인의 자잘한 호의에 상대가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직장 내, 남성은 상대적으로 업무 외적인 호의는 사적인 의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직접적으로 성적 매력을 통해 이득을 볼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돌려받지도 못할 호의는 삼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나열한 방법들은 어쩌면 남녀의 구분 없이 원활한 직장생활에서 필요한 능력인 것 같다. 물론 그만큼 이미 직장 내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형성됐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알아두면 보다 편하고 차별 없는 직장생활이 가능할 것이다.
여성들에게 직장은 아직 남성이 주류인 사회일 것이다. 이러한 환경을 여성이 적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며, 계속적으로 남성적 사회의 요구에 맞추는 것도 답은 아닐 것이다. 물론, 우선적으로 남성의 성별 불평등 자각과 자발적인 권력 분배가 우선이겠지만, 여성 스스로도 개선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재인님의 책 <운명>에는 “우리사회에서 어느 여성의 능력이 남성과 비슷하다면, 그 여성은 훨씬 더 능력 있다는 생각이었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나온다. 스스로 주변을 변화시키기 어렵다면 나를 대변하는 사람에게 권력을 모아주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비록 영화에서는 여성의 소비 증가로 인해 광고계 쪽의 여성인력이 인정받는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현실에서는 외부의 영향이 아닌 여성 스스로의 노력과 사회진출로 직장문화가 변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 2006.04.26 (0) | 2012.0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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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lando
POSTECH 04 김태형
영화 [올란도]는 엘리자베스 여왕1세로부터 "시들지도 늙지도 말라"는 축복과 함께 재산을 부여받은 올란도가 이후 400년 중, 200년은 남자로 200년은 여자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여왕이 죽은 후, 영국을 방문 중인 러시아 대사의 딸 ‘샤샤’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나 그녀는 올란도를 남겨둔 채 떠나가 버리고, 상심한 올란도는 미칠 듯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광적으로 시에 빠진다. 그러던 어느 날 떠돌이 시인에게 혹평과 조롱을 받고 작가가 되겠다는 야망도 포기해 버리고 만다. 곧 영국의 대사로 중앙아시아 사막으로 온 올란도는 그곳에서 전쟁을 겪게 되고 비정한 살상에 회의를 느껴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된다. 잔에서 깬 후에, 여성이 된 올란도는 18세기 런던의 사교계로 돌아가지만 황량한 빅토리아 시대에 여자란 한낱 남자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이후 독립주의자 쉘머딘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희생이 따르는 투쟁,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는 남자의 생을 거부하고 그를 결국 떠나보낸다. 임신한 상태에서 전쟁을 보낸 올란도는 사랑과 재산을 모두 포기했지만 자신의 아이와 함께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난다.
<OR: 남자로서 혹은 여자로서>
올란도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모습은 전통적인 양성성을 가지는 인간으로 표현된다.(남성성을 가진 사람들 혹은 여성성을 가진 사람으로 구분됨 - 일례로 엘리자베스 여왕 1세는 대표적인 남성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을 통해서 셀리 포터는 분리되고 고착화된 성별 구분으로 인해 생기는 성차별과 사회상의 모순을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love>에서 남자들의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여자들의 외국인을 배척하는 태도, <Society>에서 보이는 세 시인의 여자를 비하하는 말과 이를 웃음으로써 넘기는 여자의 모습은 당대 시대의 남성과 여성상을 그대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를 풍자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페미니즘 영화의 특성상 남성우월주의의 사회의 문제와 이에 따르는 성차별을 주로 다뤘다고 볼 수 있다. 신기한 점은 남자였을 때의 올란도가 행했던 면을 여자일 때의 올란도가 부정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사샤에게 했던 “I adore you(, so you're mine)"형태의 고백, 시를 쓰며 여자를 비하하는 태도, 자유를 위한 투쟁(혹은 전쟁) 등은 올란도가 남자일 때 추구했으나, 여자일 때 부정 혹은 거부되었던 행동들이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우리는 가부장제 사회의 모습을 남자와 여자의 시각으로써 대비하여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표현들과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동안 진행되었던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모습과 그 문제점을 바라볼 수 있다.
<AND: 남성으로서 그리고 남성으로서>
이 과정에서 올란도는 독자적인 인간으로 존재하는데, 남자로 존재할 때도, 여자로 존재할 때도 당대의 성규범을 완벽하게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남자 올란도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주변인의 시각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여자 올란도는 결혼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문학모임을 주선했을 뿐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쉘머딘을 거부하고 사랑을 위한 임신을 요구했다. 하지만 시대의 상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점도 있다. 이러한 올란도의 양성성은 현대에 들어서 비로소 완성되는데, 경제적 기반인 성을 떠나 자립 가능한 경제적 수익기반을 가진 점과 전쟁 후의 변화된 사회가 이를 가능하게 해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최종적으로 올란도는 천사(성별이 없음)의 노래를 통해 남성, 여성의 구분이 아닌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난다.(이는 소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보이는데, 시작과 함께 죽는-<Death> 단일성별의 올란도가 각 사회와 과정을 통해 양성성의 완전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남-<Birth>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이는 양성평등의 최종적인 모습이 남성/여성의 분리 및 지속적인 투쟁이 아닌 개개인을 양성을 가지는 인간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함을 말하는 듯하다.
[달콤, 살벌한 연인] - 2006.04.21 (0) | 2012.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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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꿈
20041193 김태형
‘민족과 여성’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야하겠지만, 과연 그래야 할까란 질문을 하게 된다. 민족과 여성이라는 두 단어는 과연 어떠한 기준으로 대립 혹은 나열될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민족주의라는 거대 담론 아래서 여성이 억압 혹은 착취되어 온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여성에게만 부과된 것일지 혹은 여성을 억압한 것이 진정 ‘민족’이라는 개념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지금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민족 혹은 나라를 위해 세계 곳곳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인간들과 총을 겨누고 있고, 과거 광부와 간호사들도 민족 혹은 나라를 위해 개인을 희생해왔다. 때문에 나는 개인적으로 민족주의의 담론아래서 ‘여성’이라는 특정 계층이 대립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가정을 통해 상황을 뒤집어보자. 만약 군인이 남자가 아닌 여자로 구성되어 전쟁이 이뤄진다면 기지촌에 있는 성매매 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지금처럼 여자가 아닌 남자로 구성되어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때는 ‘민족과 남성’이라는 주제로 우리는 토론을 해야 할까? 난 확신할 수 없다.
때문에 나는 민족과 ‘여성’의 관계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 오히려 깔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은 성매매 여성과 그 외의 여성, 성매매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성매매를 반대하는 사람들 등의 대립관계가 오히려 명확한 논쟁점을 짚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질문만 적고자 한다.
1. 성매매의 기준은 어디까지 인가?
직접적인 성관계를 통한 금전적인 거래일까? 그렇다면 성관계의 기준은 또 어디까지일까? 삽입? 사정? 사이버 섹스와 폰섹스도 성매매인가? 아프리카 방송을 통해 웃음을 팔아 돈을 벌어들이는 속칭 ‘별창’들은 과연 성매매를 하는가? TV에 나오는 수많은 걸그룹들은 짧은 치마와 달라붙는 옷으로 ‘성적 매력을 발산’한다는데 그것을 시청하는 우리는 성을 소비하는 것인가? 데이트 대행을 해주는 여자들은 성매매인가? 남자와 연애하며 명품백과 데이트 비용 등을 해결하는 여자들은 성을 매개로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그들은 성매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아니면 원래 남녀의 관계는 성매매에서 시작되는가?
2. 성매매는 불법인가?
4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만큼 성매매는 인간 사회에서 떨어질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다. 그리스 시대에는 여성이 아닌 아동 성매매가 있었고, 현재의 일부 사회에서는 장애인의 성적 권리를 위한 성 봉사의 개념으로 국가에서 비용을 보조하기도 한다. 위의 질문에서처럼 성매매의 기준을 정할 수 없다면, 성매매가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도 힘들지 않을까?
3. 성매매는 남성의 전유물인가?
예전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함부로 말할 수 없지 않을까한 질문이다. 아니, 우스갯소리로 “마님은 왜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었을까?”와 같이 실질적인 화폐의 교환 외에도 성매매는 남성과 여성 구분 없이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다. 군 생활 중에 ‘호스트’생활을 했던 후임을 만났었다. 성매매 “여성”을 만날 일이 없던 나는 그 녀석을 통해 ‘성매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되었다. “여성도 성을 구매할 수 있다”는 점, 간과할 이유는 없다.
<타인에게 말 걸기>, 은희경 - 2010.12.11 (0) | 2012.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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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 2010.11.30 (0) | 2012.02.17 |
<중국인 거리>, 오정희 - 2010.11.18 (0) | 2012.02.17 |
<Family와 families: 현대 가족의 구성> - 2011.10.21 (0) | 2012.02.17 |
<소년은 울지 않는다>, 2010.11.15 (0) | 2012.02.17 |
중국인 거리
20041193 김태형
그녀는 초조했고, 나는 초조하다.
마지막 부분의 ‘나’의 초조로 인해, 성장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몇 번을 읽어도 무슨 글을 써야할지 모르겠다. 주제가 <‘젠더’로 세상보기>라 여성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임을 알겠지만 그래도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많은 이성 친구들과 그들과의 대화로 여성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알 수 있다고 자부하는 바지만, 이러한 소설을 읽고 나서 무엇을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것은 결국 남자는 남자라는 말일 것이다. 알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이해하지만 공감할 수 없는 것인지조차 애매할 따름이다.
내가 발표해야 할 소설 <코리언 솔져>를 읽었을 때 딱 느낀 것이 바로 ‘군대를 가지 않은 사람들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이해할까?’였는데, 중국인 거리를 읽는 내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어떠한 사건을 격은 사람과 격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아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래도 지금까지 읽었던 많은 소설들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도 ‘잘 모르겠다’, ‘핵심을 잡기 어렵다’ 정도였는데 중국인 거리는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냥 모르겠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느낌을 소설 속에서는 다양한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공감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멍청히 바라볼 뿐이다.
소설 속에는 수많은 ‘여자’가 등장한다. 각기 다른 나이로, 상황으로 관계로……. 결혼 석 달 만에 남편과 조면한 할머니, 젖망울이 쓸려 잠도 제대로 못자는 언니, 이미 여섯 명의 자녀가 있음에도 두 명의 동생을 더 낳는 어머니, 옆집의 양갈보 매기 언니, 그녀의 딸 제니, 아버지의 사고로 미장원에서 일하게 된 치옥이, 그리고 ‘나’까지 소설 속의 많은 ‘여자’들은 각기 다양한 삶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죽고,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물론 함부로 말할 수 없겠지만, 이들 중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상황은 별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적어도 생각한다.) 아무래도 같은 관찰자의 입장인데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회상을 의식하고 있어서일지 모르겠다.
[응, 계모야], [난 커서 양갈보가 될 거야], [짐승의 새끼야], [평생 자식을 실어보지도 못한 몸이라 아직 몸매가 이렇게 고우시구나] 라고 말하는 그녀들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하지만, ‘검둥이’가 싫다고 했음에도 아침에 매기언니의 방문을 서성이고, 맥아더 동상에 올라 “인생이란…….”을 되뇌고, 술 마시고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보며 알지 못할 슬픔을 느끼는 ‘나’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여자의 2차 성징이야 말로 남자가 이해하지 못할 여성들의 고유 영역인가 보다. 영화 ‘장화, 홍련’을 보았을 때, 첫째가 초경을 경험하며 악몽을 꾸는 장면이 유명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그 장면에 공감한다는 리플을 달았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소설 속의 사춘기를 겪는 ‘나’를 나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기지만,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른다는 그녀들의 사춘기를 나는 도저히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모르겠다는 말을 뭐 이리 길게 쓰는지 모르겠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 2010.11.30 (0) | 2012.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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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부와 같이 혼인으로 맺어지거나, 부모·자식과 같이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집단.
식구: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본 글에서는 families에 대응하는 단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1.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가족'입니까?
-> '국민학교'시절 사회 시간에 나왔던 주제는 '대가족과 핵가족'이었다.
사회가 점점 핵가족화 되어간다며 대가족의 장점과 핵가족의 장점을 비교하며,
어떠한 가족의 형태를 원하냐는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내 나이 스물다섯이니 15년 전의 얘기다.
그때 대가족이 핵가족이 된다고 우려했던 내가
이제는 핵가족이 붕괴된다고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의 고민을 할 때, 우리 집에는 삼대가 살고 있었고,
셋째 작은 아버지가 분가한 직후니 어찌 보면 대가족의 형태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의 우리나라 (혹은 사회)는
근대 이전에서 근대를 거쳐 탈근대(혹은 현대)사회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일까?
(고모들은 모두 결혼했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신지 좀 됐고, 할머니는 아직 함께 사신다.)
우리 집은 어디까지 왔는가?
2. 다양화된 핵가족의 형태가 ‘탈근대 가족’은 아니다.
-> 현재 생활의 다양화로 인해 핵가족의 형태마저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흔히 생각하는 기본 가족의 단위인 핵가족을 ‘근대 가족’으로 정의하도록 하자.
근대 가족이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를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형태가 기본이라면,
탈근대 가족은 삼각형의 한 꼭짓점이 없는 경우(편부, 편모, 무자녀, 조손 등)나,
삼각형이 아닌 다각형(대가족? 재혼가족?) 형태의 가족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성원 차이로서의 구분>이 근대와 탈근대를 가르는 기준이라면,
근대 가족의 문제가 탈근대 가족이 된다고 해결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편모, 편부 슬하에서의 자녀들도 부모가 주는 압박감은 그대로일 것이고,
그 부모들도 (혹은 조부모도) 자녀를 위한 희생과 기대는 여전할 것이다.
누군가는 아버지의 '자리'를 지킬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모성'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단순 구성원 상의 [가족의 해체] 방식은 ‘탈근대 가족’이라고 할 수 없으며,
역시 '근대 가족'의 해결책이 되지 못하다.
3. ‘근대 가족의 문제: 기능적 분업화’의 재정의
-> '근대 가족'의 정의부터 다시 짚고 가보자.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의 변화가 사회인식의 변화로부터 나오기도 했지만,
실상은 경제적 이유에서 나왔다고 본다.
경제적 근대화(포드식Ford式 분업화: 소품종 대량생산)는
대가족 형태의 협력을 기반으로 했던 농업에서 공업으로의 산업변화를 이끌었고,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가족의 [형태]를 핵가족으로 변화시켜야만 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가족의 구성원은 각각 다른 역할을 맡게 됐다.
아버지는 돈 벌어오고,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맡고,
큰아들은 공부하여 가족의 신분상승을 이끌어야 하며,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돕고, 딸들은 어머니를 돕고.....
즉, '근대 가족'이 구성되면서 가족 구성원간의 '기능적 분업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혹은 이러한 '분업화'가 가족의 기준이 된 상태를 근대 가족이라 부르게 된다.)
물론 근대 사회에서는 '근대 가족'의 형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에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분업화'가
불가피한 선택 혹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제적, 사회적 탈근대화가 형성되면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탈포드식(Post-Ford式: 다품종 소량생산) 경제화는
단순한 분업노동 산업의 쇠퇴와 전문성을 강조한 서비스 산업의 성장을 유발했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아버지, 혹은 자녀가 이 전문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근대 가족의 생존이 위협받기 시작한 것이다.
(혹은, '근대 가족'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낙오된 가장, 자녀는 가족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됐고,
남은 구성원이 그 역할을 대신 떠안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자녀를 꺼리는 부부가 많아지고,
심지어 자신의 부모마저도 부양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즉, '근대 가족'은 탈근대 사회로의 변화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 문제란 분업화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가족구성원의 발생으로 정리할 수 있다.
4. families의 개념을 통한 Family의 문제 해결
-> Family는 전형적인 '근대 가족'을 대표한다.
[부, 모, 자녀의 삼각 구도와 그 역할 분담]까지를 포함한 개념이라 보면 되겠다.
families는 Famliy의 상대 개념으로 '근대 가족'의 기본 형태를 형성하지 못하는 상태이나,
여전히 존재하고 유지되는 가족을 말한다.
families의 중요성은 바로 그 '결핍'에서 나온다.
Family를 형태상으로 만족시키지 못함에도 존재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즉, "역할 분담 없이도 생존 가능한 가족의 형태가 여기 있다"고
families는 말하며, 기능적 분업화가 가족 생존의 필수가 아님을 증명한다.
또, Family의 형태가 예전만큼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families의 구성원은 가족의 부양하는 주체, 살림을 도맡는 주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각 구성원이 상황에 맞게 기능하며 가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5. 그렇다면 Family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그렇다고 Family가 가족 해체를 통해 families가 되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역할 분담을 통해 '기준'에 맞추려던 생각만 바꾸면 되는 것이다.
간단히 F-> f로 바꾸어 family로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일화 된 기준에 맞추기 위해 가족 개별 구성원의 역할과 책임을 나누는 대신
기준을 버리고 그 family 자체로서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구성원 개개인의 [인식의 탈근대화]다.
예를 들면, “아버지는 돈을 벌어 집을 꾸려나가야 한다, 어머니는 자녀를 보살피고 아버지를 내조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와 같은 고정관념을 버릴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Family를 해체하여 families를 만드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인식 변화를 통해 a family가 되는 것,
이것이 하나의 families 형태로 존재 가능한 과정이 될 것이다.
세 줄 요약
1. 가족의 ‘기능적 분업화’는 산업혁명에 의한 결과임
2. 현재는 더 이상 이러한 분업이 효과적이지 않아 기존 ‘근대 가족’에 문제가 생김
3. 이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가족(families)이 형성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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