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거리
20041193 김태형
그녀는 초조했고, 나는 초조하다.
마지막 부분의 ‘나’의 초조로 인해, 성장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몇 번을 읽어도 무슨 글을 써야할지 모르겠다. 주제가 <‘젠더’로 세상보기>라 여성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임을 알겠지만 그래도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많은 이성 친구들과 그들과의 대화로 여성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알 수 있다고 자부하는 바지만, 이러한 소설을 읽고 나서 무엇을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것은 결국 남자는 남자라는 말일 것이다. 알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이해하지만 공감할 수 없는 것인지조차 애매할 따름이다.
내가 발표해야 할 소설 <코리언 솔져>를 읽었을 때 딱 느낀 것이 바로 ‘군대를 가지 않은 사람들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이해할까?’였는데, 중국인 거리를 읽는 내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어떠한 사건을 격은 사람과 격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아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래도 지금까지 읽었던 많은 소설들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도 ‘잘 모르겠다’, ‘핵심을 잡기 어렵다’ 정도였는데 중국인 거리는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냥 모르겠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느낌을 소설 속에서는 다양한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공감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멍청히 바라볼 뿐이다.
소설 속에는 수많은 ‘여자’가 등장한다. 각기 다른 나이로, 상황으로 관계로……. 결혼 석 달 만에 남편과 조면한 할머니, 젖망울이 쓸려 잠도 제대로 못자는 언니, 이미 여섯 명의 자녀가 있음에도 두 명의 동생을 더 낳는 어머니, 옆집의 양갈보 매기 언니, 그녀의 딸 제니, 아버지의 사고로 미장원에서 일하게 된 치옥이, 그리고 ‘나’까지 소설 속의 많은 ‘여자’들은 각기 다양한 삶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죽고,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물론 함부로 말할 수 없겠지만, 이들 중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상황은 별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적어도 생각한다.) 아무래도 같은 관찰자의 입장인데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회상을 의식하고 있어서일지 모르겠다.
[응, 계모야], [난 커서 양갈보가 될 거야], [짐승의 새끼야], [평생 자식을 실어보지도 못한 몸이라 아직 몸매가 이렇게 고우시구나] 라고 말하는 그녀들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하지만, ‘검둥이’가 싫다고 했음에도 아침에 매기언니의 방문을 서성이고, 맥아더 동상에 올라 “인생이란…….”을 되뇌고, 술 마시고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보며 알지 못할 슬픔을 느끼는 ‘나’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여자의 2차 성징이야 말로 남자가 이해하지 못할 여성들의 고유 영역인가 보다. 영화 ‘장화, 홍련’을 보았을 때, 첫째가 초경을 경험하며 악몽을 꾸는 장면이 유명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그 장면에 공감한다는 리플을 달았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소설 속의 사춘기를 겪는 ‘나’를 나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기지만,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른다는 그녀들의 사춘기를 나는 도저히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모르겠다는 말을 뭐 이리 길게 쓰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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