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서 거의 전집을 사들였던 작가.
삶의 고발형 소설,
이제는 모두가 잊어버린 폭주족 십대, 가출 청소년의 이야기.
화자의 나이가 어린데, 작가의 표현 때문인지 아니면 실제로 젊은 나이에 나름의 철학을 만든 것인지, 가끔 묵직한 대사가 있다.
중2병을 벗어나지 못한 어린 태도와 애어른에 도달한 대사와의 간극에 전반적으로 제이의 모습은 위태롭다.
[우리 같은 애들도 사람들은 전혀 못 봐요. 투명인간처럼 쓱, 지나가버리는 거죠. 좀 거북하고 불편하고 뭐 그럴 뿐이겠죠. 정 심하면 도려내면 되고.]
버려져 야생의 삶을 살게된 고양이들처럼, 섹스와 폭력의 삶을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2012년 作)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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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 내 손에 들려 있던 그 핏덩이는 어디로 갔을까? 앰뷸런스에서도 본 기억이 없았다. 그런데 그것, 그것을 뭐라고 하지, 그 물컹하고 축축한, 요란하게 소리내어 우는 작은 육신을? 정리되지 못한 어휘들이 그녀의 멍한 머리속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녔다. 하나의 단어가 수면 가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기, 아기 어딨어요?"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는 그녀를 젊은 인턴이 찍어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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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알고 있다. 세상 그 누구도 여섯 살의 내가 경험한 원초적 흥분을 재현해줄 수 없다는 것을. 지나간 기억은 외려 생생해지기만 하는데, 새로운 경험은 그에 터무니없이 미달한다는 것을 거듭하여 깨닫게 될 때, 인생은 시시해진다. 나는 너무 일찍 그것을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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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이럴 거야?"
"잡을 때까지."
제이는 완강했다. 볼은 푹 패었고 내미는 팔에는 뼈만 남아 있었다. 반지하방의 문을 열고 내려갈 때마다 차갑게 굳은 제이의 시체를 발견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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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냥 적고보니 그저 평범한 크리스마스카드가 되어버렸다. 잘 있지, 나도 잘 있다. 거기는 좀 어떠냐? 메리 크리스마스다. 대충 이랬던 것 같은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제이로서는 누구 놀리나 싶은 기분이 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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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가 하나도 없으면 여자애들은 가출을 실패하기 십상이다. 가출한 첫날, 늦어도 둘째 날까지는 지붕이 있는 잠자리를 구해야 한다. 잠자리를 제공해줄 남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선 예쁜 여자애가 필수다. 하나라도 있어야 거리의 가출시장에서 흥행이 되고 잠자리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다. 이들은 망설이는 예쁜이를 어르고 겁주어 결국은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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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그를 엎어놓고 모두 모여 등을 손바닥으로 두들겨대며 노래를 불렀다. 왜 태어났니, 씨발아, 왜 태어났니, 씨발아, 이 좆같은 세상에 왜 태어났니.
"언제까지 이렇게 사는 거야?"
여자애들이 돈을 벌러 나간 어느 저녁, 멍하니 앉아 TV를 보는 후드티에게 제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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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제이가 모노륨 바닥에 묻은 핏자국, 가해의 흔적을 닦을 때, 후드티가 지나가면서 말했다.
"찬물로 해. 피는 그렇게 닦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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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제이는 거리에서 열일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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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지 질문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지난 일 년간 나는 나 자신한테 묻고 또 물었거든. 그게 어느새 버릇이 됐나봐. 내 고통의 이유는 무엇인가? 타인의 고통은 왜 나의 고통이 되는가? 신이 내게 이런 운명을 준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죽었어야 할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그것은 무슨 뜻일까? 이런 질문들을 하는 거야. 나는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돌아다녀. 조용한 곳을 찾아 책을 읽고 생각을 해. 그런데도 늘 시간이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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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지 마. 네가 이 우주의 중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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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의 독서는 아파트 재활용품 처리장에 나온 책들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므로 계통도 체계도 없었다. 자기계발서에서 건진 듯한 잠언이 종교적 교훈과 뒤섞였고 싸구려 대중소설의 잔뜩 힘을 준 비장한 문체가 로맨스의 극적인 구성으로 스며들었다. () 그가 내 삶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자 그의 말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 문득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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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는 바다의 기이함을 단숨에 파악했다. 바다, 그것은 거대한 없음이었다. 제이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와 존재하지 않게 될 미래를 떠올렸다. 그 순간 제이가 느낀 감정은 공포에 가까웠다. 시작도 끈도 없는 우주의 시간이 바다라는 형태를 빌려 나타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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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밤의 세계에서 경찰은 호구였다. 순순히 딱지를 받아들던 낮의 아이들은 밤이 되면 피에 굶주린 좀비처럼 경찰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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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제이의 죽음을 상상하기 시작했을까. 아니, 이 질문은 비겁하다. 나는 언젠가부터 명백히 제이의 죽음을 상상해, 아니 바라왔던 것이다. 여러 번에 걸쳐 매우 구체적으로 나는 제이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그려왔다. 그의 부재가 가져다줄 달콤한 비애의 맛까지도 어느 정도 예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더 나아가 나는 제이의 죽음에 가장 직접적인 관련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도 상정해보았다. 다시 말해 나는 살인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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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저 밤새 달렸다. 굼뜬 경찰을 피해 게릴라처럼 숨바꼭질을 벌였다. 정치적 비전이나 구호도 없었다. 요컨대 그들이 원하는 것은 매우 단순했다. 한밤의 퍼레이드. 그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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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분위기상 천 대는 모이지 않을까?"
가스통의 예상이었다.
"와 씨바, 존나 떨린다."
흥분을 못 이겨 앞으로 치고 나가는 짝눈을 경광봉을 든 제이가 앞커버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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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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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자주 듣는 말은 뭐니?"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예요."
"제이가 했던 말이지? 그런게 그게 무슨 뜻이야?"
"뜻은 모르겠어요. 그치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쩐지 제이가 저를 용서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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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야? 이 밤중에."
"아무 일도 없어."
"겪어서 안 될 일은 아예 격지 않는 게 좋다."
"뜬금없이 그게 뭔 소리야?"
"뭔 일인지 모르겠다만, 할까 말까 싶은 일은 그냥 안 하는 게 좋아."
"아무 일도 없대도 그러네. 제발 무슨 감 있는 척 좀 하지 마. 엄마는 그런 감 없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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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죄송해요. 그냥 가만히 계시면 돼요. 제가 다 알아서 해요."
제가 다 알아서 해요. 아직 솜털이 보송한 소년의 이 말에 갑자기 맥이 탁 풀려버린다. 윤리는 둑과 같다. 어느 정도까지는 자아를 지켜주지만 한번 터지면 격렬한 방류가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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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죽는다면 오늘은 오토바이를 탈 거예요."
목란이 씩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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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현실이 된대요"
제이가 담당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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